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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길



 

적군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진군하는 군인들만 보인다. 날아가는 포탄만 보일 뿐, 적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군인들은 '목표'를 갖고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쓰러지기 위해 소리치는 것처럼 보인다. 전장의 상황이 전해온다. "모두 부상중입니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전해 들은 장군은 움츠려든 우리 쪽 요새를 향해 포를 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현장의 지휘관은 그 명령을 따를 수 없다. 카메라는 철저히 우리 군의 모습만 비춘다. 적의 모습은 단 한 컷도 보이지 않고, 진군과 패퇴를 반복하는 아군 비명만이 담겨있다. 잔인할 정도로 이들을 응시하게 만든다. 스탠리 큐브릭이 만든 <영광의 길>의 한 장면이다.

처음부터 무의미한 전투였다.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병사들은 상부의 지시를 따라 적의 요새를 공격하지만 그것은 고작 '참호 하나를 더 점령하기 위한' 전투일 뿐이다. 전선은 움직이지 않고 미세한 차이의 땅따먹기만 반복되는 전쟁일 뿐이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알지도 못한채, 병사들은 뛰고 또 넘어진다. 프레임 밖에서 날아오는 포탄은 그 발사 주체를 알 수 없어 더욱 두렵게만 느껴진다. 이 '거대한 체스판' 을 움직이는 장군은 불만스럽다. '왜 두려워 하는가' 그는 병사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쓸모없는 병사들을 게임에서 배제시키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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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를 위한 전쟁에 휩쓸린걸까'  영화 속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채 참호 밖으로 내뱉어진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20대의 대부분은 싸움의 이유도 모른 상태로 전선에 섰다.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면 적에게 조금이나마 타격을 가할지도 모른다. 표창을 받고 진급을 해, 판을 짜는 장군이 되면 승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나머지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장의 어느 곳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수밖에 없다. 피로 물든 전우의 시체를 많이 보는 것은 '승리의 의 길'에 들어서는 가장 확실한 통행증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고자 하는 이들은 아군을 향해서도 총구를 뿜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땅을 밟을 필요가 없어진다. 쓰러진 동료를 밟고 서면 되기 때문이다. '승리의 길'에 들어섰다는 증거다. 이미 멀어진 우리편 기지는 어떻게 됐을까. 여전히 포격이 가해지고 있다. 병사들이 마지못해 뛰쳐나오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공격을 가하는 것은 또다른 우리 편이다. 애시당초 '적'은 없었다. 적은 전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게임의 조건'일 뿐이다. 장군은 정기적으로 좌표를 일러주면 된다. A 기지에게는 B를 공격하라는, B에게는 A를 공격하라는 것이다. 앉아서 당할 수 없는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 적'을 쫓을 때, 사회는 "활력을 띄고 있다"고 설명된다.  


통행증 뒷면엔 병사들이 적어놓은 소원이 적혀있다. 동일한 내용의 '행복의 조건'들이다. 하지만 '행복'을 위해선 이 모든 전쟁이 불필요하다. "모든 종류의 전쟁에 반대하며, 모든 종류의 살상 무기를 들 수 없다"는 양심적 병역거부의 이유는 우리 삶의 제1원칙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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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기사에 <전 세계 골치 '청년 백수'......>라는 제목이 달렸다. 스페인의 청년 실업률이 44.5%에 이르고, 유로존은 22.4%, 미국 역시 20%에 육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전쟁에 나선 우리를 걱정하고 있었다. 시스템이 붕괴한 원인을 알고 있었고,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주체를 향해 '돌봄의 미학'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엔 스스로 게임에서 아웃된 젊은이들을 향한 불편한 시선이 존재한다. '왜 싸우지 않느냐'는 다그침이다. 고학력 고스펙의 총알을 장전하고, 여느 세대도 누리지 못한 풍요속에서 자랐으면서 무기력하게 총을 내려놓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현실적인 조언도 들려온다. 갖가지 '단기인턴'과 '삽질일자리'로 채워진 '희망(고문)세트'는 아군을 향해 포를 쏘는 장군의 자충수와 닮았다. 장군은 '영광의 길'을 걷기 위해 전투를 이기고 싶지만, 전쟁의 승운은 그와 궤를 달리할지도 모른다.
그 길의 다른 이름은 '공멸의 길' 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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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적 '골칫거리'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 죄송스럴 따름이다. 걱정 안해도 된다. 남을 죽이지 않고 사는 법을 찾고 있을 뿐이다. '공생의 길' 이 있다면 그 길을 걷고자 한다.






by shure | 2010/02/04 02:58 | 트랙백 | 덧글(1)

극(極) , 극(劇)




"너와 난 상극이다"

옳지 않은 용례였다. "너와 난 취향이 다르네" 혹은 "하고 싶은게 다르네" 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어떤 반감이 개입 되었던 것인지, 다소 부정적 어감으로 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이어진 설명 덕에 오해는 없었다.

그와 내가 꿈꾸는 미래의 상(想)이 달랐을 뿐이다. 그럼에도 '상극'이라는 단어로 우리의 미래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듣기에 따라선 만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얼마 전 오늘 같은 식사 자리에서도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 "그게 꼭 필요해?" 그가 준비하던 시험에 관한 '편견과 무지'가 개입된 질문이었다. 그가 꽤 편해지려던 참이었다. 

사적 행복보다 직업적 행복을 우선시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닮았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우리는 '상극'에 놓였는지도 모른다. 속마음을 숨기지 못한 것이다. 배려 따위는 없었다. 싫어하는 사람이 뱉어낸 숨이 섞인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꺼린다는 누군가의 결벽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분명 그가 싫은 것은 아니다. 세상엔 더 마음에 안드는 사람, 더 섞이기 싫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가 '빵꾸똥꾸'가 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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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원해도 이뤄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결과를 의도할 수 없다. 결과에 이르기 위해 땀과 피를 거듭 흘리는 과정까지가 인간의 몫이다. 그리가 나면 운명은 심드렁한 동작으로 다시금 주사위를 굴린다."

간절했음에도 포기했던 건, 아직 내가 흘린 땀과 피의 '진정성'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는 충분히 붉지 않았고, 땀은 이내 말라버렸다. 이른 '결과'를 거부하고 인간의 몫을 다시 요구하고 있다.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운명이 굴렸던 주사위를 감히 다시 집어들었다. 

현재의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비극이 생긴다. 오지 않을 미래를 기다리거나 과거의 추억을 갉아먹느라 현재를 경시하기 때문이다. 비극을 제 손으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다시 던진 주사위의 숫자는 더 나빠질 수 있다. 운명은 여전히 심드렁하다.

어찌됐든 '인간의 몫'을 해야한다. '사람답게 살자'는 다짐은 그 '몫'을 제대로 하라는 뜻이다. 비극을 지우고 희극을 써내려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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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짧은 희극의 주인공이 된 친구에게.

그녀는 나와 다른 선택을 했다. 그녀는 비극을 쓴 적이 없다. 적어도 우리 눈에는 가장 열심히 준비했고, 또 준비된 친구였다. 다만 그녀가 써내려간 웃음의 코드가 가고자 했던 자리와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도전은 끝나지 않았고, 잠시 쉬어갈 뿐이다. 오래도록 꿈꿨던 무대와 '상극' 인 자리에 간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심드렁한 운명이 장난을 멈췄으면 좋겠다. 지금 선택한 그 곳이 좋은 구름판이 되어 더 큰 무대로 솟아오르길 바란다. 








by shure | 2010/01/30 02:41 | 트랙백 | 덧글(2)

<500일의 썸머>





500일의 썸머(500 days of Summer)

감독 : 마크 웹 / 출연 : 조셉 고든-레빗, 조이 데 샤넬

 

“이 영화는 허구입니다. 등장인물이 특정인물과 닮았더라도 절대 우연일 뿐입니다.” 영화 시작과 함께 다가오는 경고를 무심히 넘기려다가도 ‘특정인물’이 되어버린 내 모습을 발견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뻔한 로맨틱 코미디가 뭇 솔로들의 ‘로맨심’만 자극한다고 굳이 피하는 이들이 있다면 더욱 봐야할 영화. ‘재간둥이’ 톰이 ‘미친 결벽녀’ 썸머를 사랑한 500일의 기록이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톰 앞에 ‘독한 여자’ 썸머가 나타난다. “누군가의 애인이 되는 건 싫다. 구속당하는 것도 싫다” 는 썸머에게 톰은 묻고 싶다. “복사실에서 몰래 키스하고, 샤워하면서 섹스하는 게 어떻게 친구사이일 수 있는지” 닮아서 사랑하고, 달라서 헤어지는 남녀사이의 뻔한 공식을 되뇌는 영화라는 오해는 잠깐. 내가 진정 몰랐던 것은 상대가 아닌 ‘나 자신’ 이라는 사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특한 영화다.  

영화 속 톰의 직업은 카드 속 문구를 만드는 카피라이터다. 하지만 그가 만들고 싶은 것은 글이 아닌 공간. 건축가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매일매일 부서지는 건축물을 짓느니 영원히 남는 글을 쓰겠다”는 다짐으로 택한 직업이지만, 현실(카피라이터)과 꿈(건축가) 사이에서 카메라가 보다 강조하는 것은 ‘꿈’의 영역이다. 썸머의 팔에 그려주는 ‘꿈꾸는 도시’의 모습은 카드 속 어떤 글귀보다 달콤하다. 누군가의 메시지를 대신 전하는 카드 문구의 가식과 공허함 보다는 불안정한 것들이 마주해 섰다가 이내 부수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는 공간의 창조가 ‘사랑’이라는 감정과 더 어울림을 인정하게 된다. 규모와 역할이 다소 바뀔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연애사 역시 이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 막 건물을 설계하는 솔로, 이사 혹은 재개발에 욕심내는 커플 모두에게 기억될 ‘우리’ 이야기다.

 

<Springtime> 2010.2

by shure | 2010/01/28 19:41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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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사고는 논리적이고 일관적이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일반론을 빨리 갖고 싶어 하고, 한번 그 일반론을 알았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그걸로 가고자 한다. 그러다보니 그런 일반론에 맞지 않는 사례를 만나면 쓸데없이 너무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 살게 된다. 어려서부터 습관적으로 받아들인 통념이나 이미지가 괜히 삶을 힘들게 하는건 아닐까. 따져보면 삶에 주어진 것이 적지 않은데 그걸 즐기지 못하고 힘들어 한다. 통념을 구성하는 논리가 삶의 실체를 소화시키기에 얼마나 부족한 것인가..."

_ <부메랑 인터뷰> 이동진, '홍상수' 

 

"열등감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의 몫이다. 추녀를 부끄러워하고 공격하는 건 대부분 추남들이다. 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다들 시시하게 보는데 자신이 더욱 시시해진다 생각하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여자일수록 가난한 남자를 무시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안 그래도 불안해 죽겠는데 더더욱 불안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인간들의 세계는 그런 것.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봐줄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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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것없는 인간들에겐 그래서 '자구책'이 없다. 그렇게 서로를 괴롭히면서 결국 그롷게 평생을 사는 것. 평생을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세상의 비극은 서로를 부끄러워하면서도 결국 보잘것없는 인간들은 보잘것없는 인간들과 살아야 한다는 현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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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론에 몸서리치다 열등감에 자폭한다. 열등감은 나를 구성하는 통념이 되고 쓸데없는 고통을 수반한다. 자구책을 알아보려는데 책상 밑 다리 앞으로  털슬리퍼를 내민 그녀는 지독히 통념적이다. 때마침 내리는 눈송이 마저도 건조하게 만들어버리는 부끄러운 마음을 접고 얼른 도망쳐 나온다. 비가 되버린 눈을 기억하고, 통념에서 벗어난듯한 친구와 밥을, 커피를 먹는다. 보고 싶지 않았던 예매권을 애인과 보시라 양보하고, 가까운 곳에 서로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추억 부스러기 주워먹는 뻔한 잡담이지만, 여느 통속극에서 그러하듯, 스물여덜과 스물다섯을 살아가는 남과 녀의 그럴듯한 고민도 담아낸다. 같이 넘어질번한 빙판길에도 웃음이 끊이지 않고, 세상을 신기한 듯 바라볼 줄 아는 그녀의 도전이 반갑기도 하다.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의 어감에도 만족했는데 스물여덟의 어감도 나쁘지 않게 들린다. 보잘것 없는 인간들의 세계를 아둥바둥 살아가는듯 하지만, 그래서 통속의 끝을 달리는 얘기들을 끄집어 내지만 나쁘지 않다. '쿨하다' 라는 단어를 10분에 한번씩은 뱉어냈는데, 그건 우리가 '쿨함'을 동경해서인지, 그것을 비웃어서인지 확실치 않다.







 

by shure | 2010/01/28 02:10 | 트랙백 | 덧글(0)

용산, 살고 싶다.


살을 에는 추위였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서울역이, 자리를 뜨지 못한 한 무리의 사람들로 가득찼다. 오늘만큼은 오고감의 통로가 아닌, 가족을  떠나보내는 아픔과 억울함을 채 밝히지 못한 미안함이 만나는 자리였다. 두시감 남짓 서 있는데도 무릎이 굳어 계단을 오르기 힘들었다. 355일, 차디찬 냉동고에 누워있었던 망자의 육신도 그렇게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도심의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혀 진압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순간, 그 마음은 고통은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것이다.

1년 전, 망루위의 화염이 그들을 죽였고,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며 1년을 버텨온 정부와 자본의 차가움이 그들을 한 번 더 죽였다. 차갑게 굳어버린 건, 다섯 구 시신만만이 아니다. 1년을 버텨온 유족들의 심신도, 만지면 부서져버릴 것처럼 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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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 보내는 자리, 그동안 한 번이라도 찾지 못한 미안함을 갖고 사람들이 모인다.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1년 전 고인들의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순간에도, 산자는 살아야 한다. 뜨거운 속에 더 뜨거운 것을 들이부어 어쩌겠냐마는, 살고자 하기에 어쩔 수 없다.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고, 살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커피 아주머니도 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잊혀진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아이의 머릿속에 이 날의 서울역 광장이 남아있을리 없겠지만, 아이 가슴에 리본을 달며 이곳을 찾은 어머니의 마음은, 그녀가 자랄 때까지 함께할 것이다. 용산을 잊지 않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감사합니다"

용산사건의 변호를 맡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의 변호사, 간사님들. 1년이 다 되도록 끝나지 않는 싸움에 많이 지치셨을테다. 이분들의 싸움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다행히 검찰이 내놓길 거부하는 수사기록 3000페이지의 공개가 이뤄질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아버지를 죽인 아들' 이 되어버린 고인의 아들과 '여기 사람이 있다'를 외칠 수밖에 없었던 철거민의 억울함이 있는 한,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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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찾았던 용산. 이렇게 긴 싸움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의 절규처럼,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 이다.

세상을 사려고 했던 사람들과, 살고자 했던 사람들. 우리는 누구의 편일까.












by shure | 2010/01/12 01:05 | 망상,항상,일상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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